고암(顧庵) 이응로(李應魯)선생의 전시회가 열렸다. ‘다시 고암을 생각한다’ 라는 주제로 덕수궁 미술관의 전시회는 20년대 사군자 문인화로부터 시작하여 사실주의적 회화, 반추상을 거쳐 80년대 ‘군상’ 연작에 이르기까지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재료와 구도의 제약을 뛰어넘어 서구 추상 미술과의 집요한 조화를 추구했던 그의 그림편력과 삶의 여정을 따라 산책을 시작한다.
후반기의 대표작으로 꼽는 ‘군상(群像)’ 앞에 섰다. 사진으로만 보아오면서 궁금증을 키웠던 작품이 아니던가. 사진만으로는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림 앞에서 가슴이 뛴다.
광주민주항쟁을 시발로 제작했다는 ‘군상’ 시리즈는 특정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기 보다는 익명의 다수가 공감하는 자유에 대한 갈망처럼 보인다. 선생 작품에서의 주제 표현은 이처럼 직접적인 상황 묘사가 아닌 함축적 필묵의 세계로 회귀하고 있으니 이는 당신이 평생을 쌓아올린 직관력이 응집된 동양화의 신세계가 아닐까.
다리를 쭉쭉 뻗으며 물살을 가르는 개구리인양 그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겠다. 농담(濃淡)이 다른 먹빛의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움직임으로 어딘가를 향해 뻗어가고 있다.
캔버스는 인산인해다. 분절된듯하다가 힘차게 이어진 그들의 팔다리가 역동적이다. 해질녘이면 금남로로 도청 앞으로 모여들던 민초들이 오늘은 덕수궁 현대미술관의 전시실에 박제된 채로 걸려있다. 그러나 오늘은 역사 속에서 숨쉬던 그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그 날의 함성이 재연된다.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행방불명된 아들을 찾아 울부짖는 아낙은 실성한 듯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중얼거린다. 상무관에서 가족의 시신을 확인한 초로의 남자는 초점 잃은 쾡한 눈빛으로 걷고 있다. 5월 광주의 군상들이 저 안에서 출렁댄다.
화폭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의 호소력은 군중들의 함성과 절규를 담은 어느 민중화가의 대형 걸개그림보다도 덜하지 않다. 오직 수묵(水墨)만으로 저처럼 생동하는 움직임을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온몸으로 시대의 아픔을 치룬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리라. 선생의 인생 여정은 어떠했기에 군중의 저런 움직임을 화폭에 옮길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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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암(顧庵) 이응로(李應魯)선생이 광주민주항쟁을 시발로 제작한 ‘군상’ 시리즈! 해질녘이면 금남로로 도청 앞으로 모여들던 민초들이 오늘은 덕수궁 현대미술관의 전시실에 박제된 채로 걸려있다. |
고암 선생은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89년 타계하기까지 파란 많은 시대를 살며 화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문하에 입문하여 사군자의 화법을 답습하는 것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숲에서, 예술이란 관념적 모방이 아닌 개성적인 창조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인식의 깨어남은 선생만의 조형성으로 승화되어 작품 ‘청죽(晴竹)’을 완성시키게 된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숲을 본 사람이 어디 선생뿐이었을까. 누구나 볼 수 있는 장면이 유독 그에게 큰 의미로 다가와 전환의 계기가 되었으니 그 후 사군자 소재를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탈바꿈한 일련의 작품들과 다양한 예술세계를 펼쳐 갈 잠재성을 엿볼 수 있겠다.
이어 1935년 일본 유학 중에는 전통적인 문인화의 관념성을 뛰어넘어 주변 현실을 사실적으로 화폭에 담아내게 된다. 그 후의 풍경화에서는 과감한 생략과 강조로 핵심만을 전달하였는데 이는 50년대 반추상 양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되었다는 인물화나 풍경 등에서도 단순한 선이 인상적이다. 그림의 대상과 관심사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해석 없이는 저렇듯 대담하게 표현될 수 없었으리라.
분출하는 듯한 먹의 번짐과 붓질에서 전통기법을 벗어난 자유로운 기질을 짐작케 한다, 후반기 문자 추상 못지않은 파격과 일탈의 조짐이 이때부터 용틀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58년 프랑스행은 선생의 삶과 예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그가 가꾸어낸 예술의 꽃은 서양이라는 곳이었기에 가능했던 것만은 결코 아니다. 서양을 체험한 예술가가 그만은 아닐진대 그들이 모두 이렇듯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개진할 수 있으랴.
서양문화의 경험을 동양적 뿌리 위에서 그만의 독특한 추상세계로 펼치게 되었으니 흔히 언급되는 그의 위대성은 바로 동양성(東洋性)을 말함이리라.
또한 64년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워 유럽인들에게 동양화를 전수하였을 뿐 아니라 서예에서 조형의 문자추상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한글, 한자, 아랍문자들이 자유롭게 해체되고 재구성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도자기, 담요, 천 등의 소재 실험도 끊이지 않았으니 그에게 있어 표현할 수 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은듯하다.
이 무렵 선생의 삶의 행로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일이 터진다. 최근까지 의문투성이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조작 수사 등의 의혹을 받고 있는 1967년 동베를린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공산권 국가의 도시를 방문했다는 점과 간첩활동 혐의로 인해 선생인 고국에서 2년 넘게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감옥이라고 해서 선생의 예술적 열정마저 가둘 수는 없었다. 그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여러 작품을 시도한다.
간장을 잉크삼아 화장지에 데생을 했으며 끼니마다 모은 밥풀과 종이를 짓이겨 소조 작품 등을 만들고 알미늄 그릇에 구멍을 내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피의 분격’을 조각하기도 했다. 교도소의 높은 담장이 가로막은 절박한 순간이라고 선생의 예술을 향한 혼불을 잠재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정치, 사회적 상황이 민감하게 교차되는 현대사 속에서 쉽사리 근접하기 어려운 작가였다. 따라서 예술적 재능과 성과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오랜 기간 체류하며 높은 성벽의 파리 화단에 위치를 굳혔지만 불어를 하지 못했던 고독했던 노인, 냉전의 서슬에 의해 예술의 깊이가 조망되지 못한 채 시련의 강을 건너온 그의 삶의 흔적에 사로잡혀 시간을 잊었나보다.
아직 멈추지 않고 흐르는 듯한 그의 강을 따라 거닐다보니 어느덧 관람 마감시간이 임박했다. ‘군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아쉬운 설음으로 출입문께로 다가가니 직원이 손잡이를 잡고 문 닫을 채비를 서두른다. 멋 적은 마음에 전시장을 서둘러 빠져나온다.
계단을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그림 속의 군중들이 전시장의 액자틀을 버리고 ‘후다닥’ 계단을 내려온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는 한 여름 소나기다. 임금이 하례를 받던 덕수궁 뜰의 중화전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시청 앞 서울 광장에 요란한 조명이 일제히 밝혀진다. 그들은 일제히 횡단보도를 지나 광장으로 내달린다. 25년 전 도청 앞 광장으로 향하던 금남로의 인파를 뒤로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곤 하던 비겁자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5월의 그날처럼 군중을 뒤로 하고 귀가를 서두를 것인가. 나도 그들에 묻힌다. 어느덧 군상들과 하나가 된다.
◇ 엄현옥 프로필 現 제물포 수필문학회 부회장 인천광역시 문화예술자문위원 한국문협, 국제 PEN클럽회원 1996년 '수필과 비평' 등단 2005년 신곡문학상 수상 2004년 인천 문학상 1998 제물포 수필문학상 著書로는 ‘아날로그-건널 수 없는 강'(2004) ‘나무'(2003) ‘다시 우체국에서'(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