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그리도 그립고 애절해서 밤에 꿈으로 보여지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어린 시절 뛰놀던 대나무 숲이 심심파적으로 꿈의 단골 소재가 되는 게 여간 신기하지 않다. 어느 날엔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른 어떤 날에는 소망과 꿈의 표현으로, 그리고 간혹 필자 자신의 오늘을 뛰어넘어 어린 아이 시절로 잡아당기는 묘한 힘을 기울일 때도 있는데, 언제나 변함 없는 사실은 한결같이 꿈속의 대숲은 푸르르다는 거였다.
이 시는, 필자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을 저당잡히고, 음습한 어딘가에서 타의에 의해 머물던 시절에 향수를 얹은 채 꾸어진 꿈의 고백이다. 다른 날의 대숲에 비해 유난히 무성하게 우거져 그늘마저 어둠에 젖어있는 형상이,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맹수의 발톱처럼 느껴져, 자면서도 몸부림치면서 벗어나려 애쓰다 꿈에서 깬 듯 하다. 한숨을 쉬며 참 다행이라고 여기다가는 또 금세 그리워하게 되는 대나무숲의 추억이 오롯이 묻어나는 육필시라서일까, 한참 세월이 흘렀지만 생생한 감상에 이따금 되돌아보며 옛 기억에 잠기곤 한다.
실상 대나무는 사철 푸른 잎인 건 아니고, 누렇게 빛바래고 잎이 말라 바스럭거리는 계절도 있건만 왠지 모르게 대나무숲은 늘 푸르름을 간직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가을 지고 겨울이 오면 유난스레 작은 바람에도 기척을 드러내는 게 대나무 잎이다. 그렇게 말라 비틀어지는 잎을 밀고 새잎이 나올 때 쯤이면 또 다른 솔솔바람에도 물씬 향기를 뿜어주는 대나무 숲에서 어린 시절 동심을 키우며 필자는 그렇게 호연지기를 꿈꾸었었다.
정작 현실의 삶에서는 궁핍하고 비천한 실상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변함 없이 세상 누구보다도 크고 창대한 웅비를 품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예컨대 대나무의 곧은 기상을 배웠음이리라 여긴다. 그저 바라기에는 길지 않을 세월 동안 더욱 사람다운 모습으로 사람스럽게 살다 가길 간절히 염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대나무의 옹골찬 삶을 닮아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 때로는 모범도 되는 그런 삶으로 남은 여생이 기록되어지길 또한 바란다.
목하 시절은 가을이다. 올 가을은 참 어렵게 시작되었다. 유별나게 모진 여름의 몽니에 늦도록 시달리다 겨우 맞이한 이 계절은 그렇지 않아도 길지 않은 절기인데 올 해 따라 더없이 짧을 게다. 그래서 아마도 더 소중하고 애틋한가 보다. 이 가을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보내기 위한 많은 행사들이 여기 저기서 봇물 터지듯 개최되고 있다. 오라는 데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지만 한정된 시간이며 공간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실정이다.
가을이 한 달만 더 있어준다면 고맙겠지만 하마 새벽으로는 신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니 눈 깜짝할 새에 겨울은 성큼 다가서리라. 반추하고 회고할 새도 없으며 비교하고 작심할 겨를도 없는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 나가면 되는 것이다.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을 모아 두거나 어떻게 간직해야 할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그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 뿐이다.
세상 살면서 건강하다는 건 뭘까?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건 대관절 어떤 걸까? 100미터 달리기를 15초 안에 달리면 건강한 건가? 턱걸이 100개를 하면 건강한가? 아니다. 그저 아프지 않으면 건강한 거다. 작은 병치레 정도야 일상으로 여기며 훌훌 털어버리고, 피곤하고 버거운 숙제지만 열심히 풀어나가고 있는 하루들의 삶이 건강한 삶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럼 행복하다는 건 뭘까? 돈이 100억 있으면 행복한가? 무시무시한 권력이 있으면 행복한가? 아니다. 괴롭지 않으면 행복한 거다. 세상만사 쉬운 일은 없지만 나만 겪는 고통이나 난관은 아니니, 그저 순리대로 살아가는 마음 자세가 있으면 그게 행복이다. 들뜨는 걸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쾌락이다. 쾌락은 술이나 마약 같은 거다. 슬프고 외롭고 밉고 원망스럽고 화나고 짜증나는 건, 다 행복하지 않은 상태이다. 마음이 병들지 않고 아프지 않은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은 외롭지 않고, 어진 사람은 항상 즐겁다. 언제 어디서나 남을 도우면 자기 자신도 이롭게 되어, 언제 어디서든 행복을 누릴 수 있다. 토끼를 잡을 땐 귀를 잡아야 하고, 닭을 잡을 땐 날개를 잡아야 하고, 고양이를 잡을 땐 목덜미를 잡으면 되지만, 사람은 어디를 잡아야 할까? 멱살을 잡히면 싸움이 되고, 손을 잡히면 뿌리치게 된다. 그럼 어디를? 마음을 잡자. 마음을 잡으면 평생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부터 잡도록 노력하자.
아울러 이런 삶의 태도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사물들이 있다. 그런데 그 중 큰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인간성을 훼손한다. 또한 새 것이 항상 좋은 것도 아니다. 너무 많은 기능을 가진 신제품은 정신을 산만하게 만든다. 잘난 것이 늘 좋은 것도 아니다. 잘나서 싸우는 것보다 못나서 화목한 게 낫다. 힘 있고, 많이 알고, 많이 가진 사람은 싸우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사람이다.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행복하지 않다. 그에겐 잘나고 능력 있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다. 행복하려면 차라리 못나서 잘 어울리는 것이 낫다. 필요하지 않은 신제품을 사지 말고, 무작정 더 큰 것을 기대하지도 말자. 살아가는 일만 더 복잡해질 뿐이다. 그냥 작은 행복을 바라며 작은 희망을 꿈꾸는 게 더 낫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그 뒤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희망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생겨나는 것이 희망이다. 희망은 희망을 갖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고, 희망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도 희망은 없다. 그래서 오늘도 희망 속에서 좋은 하루 보내자고 작정하며 시작하는 사람은 그날의 희망과 행복을 다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행복해질 조건은, 오늘에 충실하고 삶의 이유를 가장 먼저 나에게 두면 된다. 그러니 욕심부리지 말자.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있다면 과감하게 결별하면 되는 거다. 그리곤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편안하게 만드는 기억을 되새기자. 그 다음에는 나를 돌아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자. 가고 싶은 곳, 읽고 싶은 책,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을 만들자.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있어 과한 욕심을 버리고 차라리 마음으로 가난해지자. 어차피 죽을 때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가장 가난하고 낮은 곳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단순해지자.
슬프다고 느끼면 슬퍼지고,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면 불행하고, 그러고보니 마음이란 거 참 신기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마음을 다 내려놓고 욕심을 버리자는 말이지, 다 포기하자는 말은 아닐 거다. 모든 것은 마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거다. 마음은 스스로가 생각한 대로 움직여주는, 거짓 없이 착한 어떤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마음은 그대로 따라 하는 따라쟁이다.
남겨진 올 가을에 얼마나 더 많은 대나무 꿈을 꾸게 될지는 모른다. 그 사연이 얼마나 구구절절 가슴 저리고 애잔할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허무함과 상실감으로 얼마만큼 괴롭고 서러울지도 알 길은 없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제 어떤 형상으로 대나무가 필자의 꿈에 등장하더라도 희망과 행복을 전달하기 위해 찾아준 손님이라고 여길 거다. 그렇기에 반겨 맞으며 내일을 바라보는 꿈의 소재로 인정하려 한다. 어쩐지 당장 오늘 밤에도 필경 대나무꿈을 꿀 것같은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