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기억 되살리는 추억여행 상상하지 못해
하늘의 별…‘영호, 민식, 세현, 현만’ 네 아이
서로 몰라보고 하늘나라서 뛰어놀고 있을까?
아련한 여운! ‘서로의 안부’를 물어가며 동행
● 추억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지난해 6월 20일, 숯검댕이 가슴인 세 사람은 군산시 산북동 옛 추억의 장소를 찾았다. 서울에서 군산까지 달리는 동안 눈물 같은 빗방울이 고속도로로 흩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먼 여행은 설렘과 동시에 기막힌 아픈 추억이 되살아나 희비가 교차한 날이다. 어쩌면 <전설의 고향> 아니면 <미스터리 극장>에서나 볼 법한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으니, 그 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추억여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1989년도에 나는 군산 외항의 작은 시골집으로 배낭을 메고, 4살인 첫 아이 영호와 갓난아이인 둘째 딸 영주를 데리고 군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잠시 서울집을 놔두고 남편이 근무하는두산건설 현장 가까이서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마침 나처럼 남편을 따라온 같은 다른 세 가족도 아래윗집에 모여 살았다. 그들은 이미 몇 달 동안 같이 지내온 터이지만, 나는 둘째 딸아이를 출산 후 산후조리를 마치고 가장 늦게 합류하게 된 것이다.
영호, 민식, 세현, 현만 네 아이는 고만고만한 사내아이들이다. 민식, 세현, 영호는 직원 가족이고, 현만은 내가 살던 같은 집 마당 맞은편, 모니카 자매의 둘째 아들이다. 이 녀석들, 지금도 산북동 들판에서 뛰어놀던 것처럼 하늘나라에서 뛰어놀고 있을까? 아니면 서로 몰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가장 먼저 하늘나라로 간 아이가 현만이다. 현만이는 인도인처럼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모니카 자매님을 닮은 눈이 새카맣고 유난히 큰 겁 많은 아이였다. 늘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징징거리면서 쫓아다녔다. 그런데 내가 군산을 떠나 서울 집으로 옮긴 그해 겨울 급성 폐렴으로 6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반드시 신부가 될 거라는 내 예감은 그렇게 빗나갔다.
두 번째 떠난 아이는 민식이다. 민식이는 7살이 되던 해 아빠를 따라 이집트 현장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가족 여행 중 승용차 전복 사고로 서른여덟 젊은 아빠 손을 잡고, 누나와 남동생 태식이를 남겨 놓고 가버렸다. 그때 장례식장과 공원묘지에 안장하면서 가슴이 무척 아파 안타까워서 상주 노릇까지 하였다.
세 번째 떠난 놈은 바로 내 첫 아들놈이다. 내 아들 영호야말로 어처구니없이 세상을 떠났다. 고2 때 떠난 녀석 기일이 9월 6일이다. 해마다 기일이 다가오면 나는 가슴이 먹먹하여 여전히 손끝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처서가 지나고 조석으로 서늘한 기온이 느껴지던 날, 영호는 느닷없이 스스로 이승을 떠났다. 그것도 악질인 깡패놈이 50만 원을 당장 가져오라는 협박을 못 이겨서다. 부모인 나와 남편에게 하소연 한 마디 못하고, 그날 밤 아빠에게 이메일을 보내려다 말고서 뭐가 그리 급해서 간 건지….
아이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친정엄마가 오셔서 아이의 침대에서 잠자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외할머니 옆구리를 간지럽히면서 50원만 달라고 하였단다. 우연일까? 아니면 아이의 영혼이 왔다 간 걸까? 친정엄마는 지금까지도 아이가 깡패에게 협박당하고 매를 맞고 쫓기다가 50만 원 때문에 스스로 떠난 사실을 모르신다. 꿈을 꾸고 나서 동전 몇 개를 11층 창문 밖으로 던져주셨다.
불행은 연달아 온다고 하였다. 마침 시동생이 뇌출혈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시댁에선 비상사태가 일어난 상황이었다. 아이 입장에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유서 한 장, 말 한마디 못 하고 세상을 등졌지만, 녀석의 어리석은 선택에 나는 아직도 용서가 안 된다. 아니, 아이를 그렇게 보내야 했던 돌이킬 수 없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 33년만에 군산시 산북동 옛 추억의 장소를 찾은 네 아이의 시니어세대, 오른쪽에서 두 번째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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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아이는 세현이다. 세현이는 30세 청년이 되어서 떠났다. 어릴 때 하얀 얼굴에 동글납작한 얼굴로 아주 착하고 순하던 세현이다. 그런데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세파를 못 견디고 역시 스스로 지다니? 모두가 기막힌 운명이다. 제대로 어깨 한 번 펴지 못하고 죽음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두렵고 무섭고 힘들었을까? 이렇게 아이를 가슴에 묻은 세 여자는 군산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현만이 엄마를 기점으로 추억의 장소로 나선 것이다.
모두 30대 초반에 만나서 매일 남편들이 현장으로 출근하고 나면 연탄아궁이 단칸방인 우리 집에 모이곤 했다. 매일 수다도 떨고,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넓은 마당에서 뛰어놀았다.
1990년도에 나는 셋째 아들 출산일이 가까워지면서 현장 일 마무리 중인 남편과 헤어져 서울 집으로 왔다. 차차 현장이 마무리되면서 흩어져 살았다. 어쩌다 안부 정도 오가다 33년 만에 만나 추억 여행지를 찾아가는 군산행. 사실 왜 아이들이 어떻게 떠나야 했고, 떠난 후 서로 어떻게 극복하였는지조차 서로 조심스러워서 묻지 못한 세월이지만, 이제는 서로 묻고 대답할 수 있었다.
풋풋한 30대를 지나 60대 중후반이 되어서 만나고 보니,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때 산북동의 풋풋한 새내기 아줌마였다. 아직도 우리는 “영호 엄마, 세현 엄마, 민식 엄마, 현만 엄마”로 부른다. 아니, 우연은 아니지만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렇게 불러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 이름을 우리는 죽을 때까지도 그렇게 부를 것이다. 아이들이 추억 속에서 살아난다면,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디서라도 행복하다.
군산에서의 이틀 동안은 현만 엄마가 준비해 준 호텔 숙박과 이틀 동안 식사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현만 엄마와 아빠는 우리 셋이 군산으로 간다고 하였을 때 꿈만 같아서 몇 날 밤잠을 설치며 기다렸다고 한다. 나름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식당도 예약해서 골고루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었다. 그녀 역시, 지난해 암을 극복하고 여전히 현만이를 생각하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기도하는 삶 속에서 살고 있다.
군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산북동 우리가 살던 시골집을 찾아갔다. 들어가는 입구 모습이 많이 변하여 동네 사람에게 ‘탤런트 김성환 씨’ 자택이 어디냐고 물었다. 내가 살던 집이 바로 김성환 씨 부모님이 사는 옆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입구에 들어서고 보니, 새로 지은 집이 낯설어 기억 속 같은 집이 아니었다. 산북동 너른 들판은 여전하다. 유모차에 딸아이를 태우고, 여름 저녁 들판을 거닐던 추억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4살 영호는 엄마를 따라 들길을 거닐며 함께 노래도 불렀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까?
들판을 향해, “영호야, 민식아, 세현아, 현만아~~” 힘껏 소리쳐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다. 나중에 세현이가 들려준 말로는 이 녀석들 넷이 산북동 뒷동산 어느 공동묘지에서 슈퍼맨이 되어 날아다녔단다. 거기서 해골바가지도 보았고, 뼛가루가 날렸지만 무섭지 않았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행여나 네 녀석 모두 같이 슈퍼맨이 되어 이승을 떠나 함께 맴돌며 동행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의아심도 가져보지만, 이 모두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인가?
추억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추억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 있고, 별이 되어 떠도는 아이들 눈빛은 여전히 초롱초롱하다. 더 이상 아파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자고 무언의 약속을 하였다. 지금도 산북동 추억여행의 아련한 여운으로 단톡 대화방에서 서로의 안부를 물어가며 동행하고 있다.
■ 프로필
시인, 칼럼니스트, 한국디지털문인협회 시분과장, 청향문학상 대상, 대통령 훈장 수여, (시집) 『따뜻한 쉼표』 『종이 물고기』, (칼럼집) 『섬으로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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